저 멀리,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비추는 희망의 빛
슬레인 백작부인은 여든여덟 살에 남편과 사별했다. 정계의 거물이었던 슬레인 백작의 그림자처럼 살아온 긴 세월의 끝이었다. 성대한 장례식이 끝나자 자식들은 어머니의 삶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여기고 돌아가며 모시겠다고 제안한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나, 집을 정리하고 생활 경비를 줄여야 하는 말년의 사정으로 보나, 자식 된 도리로 보나 가장 합당한 결론이었지만, 슬레인 백작부인은 뜻밖의 대답을 한다. “난 혼자 살 생각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30년경 런던이다. 양차 대전 사이, 근대화가 한창이던 시대로 여성이 투표권을 얻어냈고,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출간한 직후였다. 작가 비타 색빌웨스트는 버지니아 울프의 동성 연인으로, 남녀 양성을 넘나드는 인물인 《올랜도》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여성 안에서 나온 남성을 성이라기보다는 그저 젊음에서 나온 젊음의 상징’이라고 표현한 비타 색빌웨스트는 남성 중심 사회와 밀착되어 보이고 문체가 활달하다. 또 그 시대의 관심사를 다양한 인물과 성격을 통해 능숙하게 부각했으며 사물을 포착하는 안목이 정교하면서도 여유로워 냉소와 위트와 너스레를 섞어 재미를 주었다. 동시에 슬레인 백작부인의 내면을 조명할 때는 시적이고 고상하고 섬세했고, 그녀의 의식을 드러낼 때는 심술궂다 할 정도로 대담했다.
“그녀는 자기 속으로 낳은 그 무리를 바라보았고, 중년에 들어섰거나 이제 본격적으로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
그녀에게서 길고도 피로한 후손이라는 뱀이 꿈틀거리며 나온 것이다.
역한 기운이 올라와 그녀는 그저 놓여날 그날만을 바라보았다.”
좋은 소설은 현실과 달리 인물의 진짜 속내를 드러낸다. 자식을 바라보는 이런 시선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당시의 독자들은 무척 당황하지 않았을까. 여성의 삶이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남편에서 자식에게로 내맡겨졌던 당시에는 결혼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남편의 죽음이었다. 화가가 되려던 꿈을 접고 10대에 결혼의 길로 내몰렸던 슬레인 백작부인이 해방된 것은 여든여덟 살이 되어서였지만, 그녀는 오롯한 자신에게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집에 어린 증손자들의 방문을 금지하는가 하면, 한 보따리나 되는 보석 전부를 큰아들 내외에게 주어버리고 놓여나며, 30년 전에 보아두고 오래 염원해온 런던 외곽의 작은 집을 보러 갈 때는 딸의 도움을 거절하고 노구를 이끌고 찾아가 직접 계약한다. 슬레인 백작부인이 생애 처음으로 겹겹이 에워싼 가족을 벗어나 혼자 살게 된 그 집은 자신처럼, 혹은 한 편의 시처럼 묘하게 완숙하면서도 무심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어쩌면 항상 종국에는 원하던 것을 얻게 되나보지.”
소설 속 말처럼 정말 원하는 대로 된다면, 사람들은 말년에 어떻게 살기 바랄까? 해답은 저마다 자신이 살아온 삶 속의 어느 순간에 이미 잉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남편과 마차를 타고 페르시아 사막을 건널 때, 하얗고 노란 나비 떼가 팔락팔락 날며 마치 양옆에서 호위하듯 따라왔던 이미지를 슬레인 백작부인은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었다. 사막의 부랑자들인 그 희고 노란 나비 떼는 저 멀리 앞에서 날아오르다가 다시 돌아와 마차를 에워싸고 뒤따르다가 다시 높이 날아올라 앞서가기도 하며 마차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뒤집어지지는 않게 자신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남편에게 딸린 부속물처럼 살았지만 슬레인 백작부인은 나비의 오래된 상징처럼 영혼의 자유와 독립과 예술을 지향해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삶과 예술적 정신이 만나며 신비롭게 통합된다.
노년기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과제다. 불길한 수수께끼이자 타성에 젖은 의식의 여분같이 보이는 어둑한 노년기를 내면적으로 가장 소중하고 능동적인 삶의 시기로 격상시키면서 너 자신이 되라는 희망의 빛을 저 멀리, 마지막 순간까지 비추어주는 강력한 힘을 가진 작품이다. 이 책이 젊은이에게 헌정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