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무는 감정이 지글지글 끓으며 주조 틀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절, 복잡하고 모순된 욕망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한 그런 시절은 다 지나갔다. _《사라진 모든 열정》
힘든 일들이 창의적인 방식으로 닥쳐올 때면, 언제까지 이렇게 다사다난해야 할까 생각하곤 해요. 그때 읽고 메모해둔 문장입니다.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슬레인 백작부인'이 지닌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어서, 저도 해마다 마음의 안식을 취하는 달을 갖기로 했어요.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는 한 달이자 흘러가는 계절을 느끼기만 하는 시간이요.
전국을 강타한 태풍에도 피해가 없으셨기를. 그럼에도 펄펄 끓을 이 계절을 무사히 통과하시기를. 이따금 흄세가 생각나는 여름이 되시기를. 오늘은 흄세 편집자가 뽑은 《사라진 모든 열정》 미리보기와 추천 콘텐츠를 소개해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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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모든 열정》 미리보기 1
지푸라기와 담쟁이와 거미, 이런 것들이 오랫동안 이 집을 차지해왔다. 집세는 내지 않았지만 가볍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동안 마룻바닥과 창문과 벽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슬레인 백작부인은 그런 존재와 함께하기를 원했다. 북적거림과 경쟁, 그리고 다른 야망을 어떻게든 피해 가려 발버둥 치는 야망들은 물리도록 많이 겪었으니까. 그녀는 거미가 아니니 거미줄을 치지는 않겠지만, 빈집으로 기어 들어온 것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산들바람에 흔들거리고 햇빛을 받으며 초록으로 싱싱하게 자라다가, 죽음이 가만히 그녀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등 뒤에서 문을 닫을 때까지 세월과 함께 흘러가고 싶었다. 그런 외부의 존재들이 그녀에게 그들의 의지를 행사하는 동안 그냥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었으면 했다. 하지만 우선은 이 집에서 살 수 있을지를 알아야 했다.
아래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그녀가 귀를 기울였다. 문 여는 소리인가? 벅트라우트 씨인가? 약속 시간은 4시 30분이었는데 이미 5시였다. 거래와 관련된 사무는 질색이지만 그를 만나야겠지. 지푸라기와 담쟁이와 거미가 차지하듯이 이 집을 차지해서 그 무리에 그냥 얹혀사는 게 더 좋겠지만. 평화롭게 정원에 자리 잡기 전까지 얼마나 처리할 일이 많을지 예상하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그녀의 물건이 마지막 여정을 끝내고 이곳에 함께 자리 잡기에 앞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이런저런 주문을 하고, 커튼이나 카펫을 고르고, 망치와 주석 압정과 바늘과 실 등의 장비를 갖춘 여러 사람을 부려야겠지. 알라딘의 반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삶을 단순화해도, 어마어마한 삶의 복잡함은 피할 수가 없다.(79~8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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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s pick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서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를 더 잘살 수는 없었을까, 이렇게 무르게 살다가는 “북적거림과 경쟁”에서 낙오되는 것이 아닐까……. 어쩐지 “알라딘의 반지” 말고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많지만, “아무리 삶을 단순화해도, 어마어마한 삶의 복잡함은" (어차피!) “피할 수가 없다”라는 ‘슬레인 백작부인’의 말에서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여든여덟 해의 삶을 살고 얻어낸 통찰이니 믿어볼 만하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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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모든 열정》 미리보기 2
젊음을 단 한 가지 종류의 관념으로 제한해서 젊은이들에게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슬레인 백작부인은 생각했다. 젊음은 그보다 훨씬 풍부하니까. 젊음은 손을 뻗는 희망으로 가득해서, 강을 불태우고 세상의 모든 종탑을 울릴 테니까. 생각해야 할 것이 사랑만이 아니라, 명성이나 성취나 천재성 같은 것도 있으니까. 그 무엇이 가슴속에 들어가 갈빗대를 마구 두드릴지 누가 아는가? 성 꼭대기 작은 탑으로 얼른 돌아가 내면의 천재성이 그 존재를 드러낼지 한번 보자. 아, 하지만 1860년에 소녀가 명성을 생각하다니, 그건 가당찮은 전망 아닌가. 슬레인 백작부인은 생각했다.
백작부인은 과거의 자신인 소녀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운 좋은 위치에 있었다. (중략) 은밀하고 터무니없는 그 생각과 함께할 수 있었다. 그 가녀린 처녀의 외양 안쪽에서 마구 내달리는 생각이란 무모한 젊은 남자가 품었다 하더라도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변장을 하고 도망가는 생각이었다. 이름을 바꾸고 남자로 변장하여 외국의 도시에서 자유를 누리겠다는. 선원이 되어 바다로 나가려는 남자아이의 계획과 맞먹을 만한 것이었다. 고수머리는 가위질을 당해야겠지. 미래를 내다보며 바짝 깎은 매끈한 머리통을 쓰다듬듯이 여기서 손 하나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갔다. 삼각 숄을 벗고 셔츠를 입어야겠지. 여기서 손가락이 넥타이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치마는 영원히 치워버려야 할 테고. 여기서, 이번엔 아주 수줍게 손이 바지 주머니로 내려갔다. 소녀의 환영이 흐려지며 그 자리에 호리호리한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남자였지만 본질적으로 성이 없는 존재, 그저 젊음에서 나온 젊음의 상징,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상상 속에서 더 고귀하게 여겨지는 목표에 복무하기 위해 여성의 기쁨과 권리를 영원히 포기하기로 한 존재였다. 한마디로 데버라는 열일곱의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126~1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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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s pick
"젊음은 그보다 훨씬 풍부하니까." 여기서 '젊음'을 '노년'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 책을, 나아가 이번 시즌 주제인 '할머니라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오늘의 미리보기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가 떠오르셨다면, 정확히 보셨어요. 주인공 '올랜도'의 모델이 바로 비타 색빌웨스트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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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모든 열정
비타 색빌웨스트 | 정소영 옮김
버지니아 울프의 연인이자 당대 더욱 인기 있는 작가였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대표작. 남편을 떠나보내고 비로소 마음대로 살기를 선언한 여든여덟 살의 주인공 '슬레인 백작부인'이 새로 얻은 '자기만의 집'에 머물며 누리는 노년의 생활을 그린다.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몰두한다는 점, 출간 당시 크게 흥행해 이 책을 출간한 호가스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했던 울프에게 금전적 여유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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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완 我玩 / Mind collector>, 2023
'무나씨'(moonassi) 작가는 마음과 자아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그림을 그립니다. 작품명은 작년 아트부산 개인전 주제이기도 한데요. '아완'은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감상한다는 의미라고 해요. 작가 노트를 보면 "나의 감정을 홀로 바라보는 일이 따분하게 느껴지거나, 어지럽게 느껴질 때, 나는 사려깊은 다른 감상자를 초대합니다. 나와는 다른 미감으로 어둡고 밝은 다양한 마음을 수집해온 또 다른 마음 수집가, 마음 관찰자를 초대합니다. 그와 함께 내 마음을 바라보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슬레인 백작부인은 햄프스테드에서 혼자 살면서 만난 노인들과 대화하며 평온함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들이 백작부인의 삶을 사려깊게 바라봐주는 "다른 감상자"가 아니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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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정원〉, 2022
평균연령 75세. 강릉의 대표적인 구도심인 명주동의 이웃 모임 '작은정원' 할머니들은 3년간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는 걸 배우다가 한 발 더 나아가 영화를 찍는데요. 그렇게 첫 단편 극영화 〈우리동네 우체부〉를 성공적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도전합니다.
"써먹기 위한 것이 아닌, 온전한 재미로 무언가를 배워본 적 있나요?"라는 메시지가 가슴에 오래 남는 다큐멘터리예요. 적긴 하지만 아직 상영관도 있답니다. 포스터에 예고편 링크 걸어두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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