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완전 할매 입맛이네”라는 말을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빵보단 떡이고, 쑥이나 흑임자라면 환장하니까. 맞아. 내가 좀 그렇지. 당연히 할머니도 그럴 줄 알았다. 20대 여성인 나의 취향이 매체에서 떠들어대는 요즘 애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은 했어도, 나의 할머니가 할매 입맛에 ‘취향 저격’ 당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온 가족이 모여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때면 메뉴는 최소 두 가지였다. “할머니 할아버지 드실 찜닭 한 마리 시키고, 우리는 치킨, 떡볶이? 아니면 마라탕?”
그건 뭐니, 그게 그렇게 맛있니, 하며 ‘애들용 음식’ 테이블에 다가온 할머니는 나도 한입 먹어보자, 했다. 그렇게 엽떡 한 입, 뿌링클 한 조각, 마라탕 한 숟가락…….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냐고, 몸 다 버린다고 잔소리할 줄 알았건만 반응이 의외였다. “맛있다.” 심지어는 몇 주 뒤, 뭐가 자시고 싶냐는 물음에 “그때, 네 삼촌 생일날 시켜 먹었던 게 이름이 뭐랬냐. 그거 맛있던데” 했다.
왜 몰랐을까? 설령 나의 할머니가 치킨보다는 백숙을 좋아하더라도 그건 ‘할매 입맛’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할머니가 그런 취향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걸.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김정순 씨,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릴 수 없는, 세상 하나뿐인 당신의 것이라는 걸.
김정순 씨는 찜닭의 뼈를 바르는 남편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입이 짧은 김정순 씨는 이미 식사를 마쳤으나, 그 남편이 혼자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뼈를 버릴 그릇을 가져오고, 느끼한 입맛을 잡아줄 새우젓을 가지러 갔다가 총각무도 딱 좋게 익었는데 하나 드실라우, 하면서.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오늘날 아동문학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얼굴이 각양각색인 까닭은 지금 우리의 얼굴이 저마다 달라서다. 어린이라고 해서 몽땅 한데 묶고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듯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의 현재는 할머니의 과거와 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니 다 다르다.”
편협한 나의 세계는 할머니라는 세계 덕에 좀 더 넓어지고 다채로워졌다. 이렇게 또 빚을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