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의 밀랍 초가 피워내는 크리스마스의 달콤함
크리스마스 잉어가 뭘까? 크리스마스 특선 요리일까 아니면 크리스마스트리에 다는 은빛 비늘이 달린 장식품일까. 《크리스마스 잉어》를 쓴 작가 비키 바움이 오스트리아 태생에 베를린에서 살았으니 요리일지도 모르겠다고, 그 부근에서 먹었던 민물 생선 요리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한국과 달리 민물 생선을 고급 요리로 취급하는 게 그쪽 문화권의 정서인지라 나는 독일에 석 달 머무르는 동안 찬더니 강꼬치고기니 하는, 책에서나 보던 생소한 민물 생선을 꽤나 먹었다.
크리스마스 잉어가 뭘까? 사탕을 천천히 녹여 먹듯이 나는 ‘크리스마스 잉어’라는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보았다. 책을 넘기면 단박에 알게 될 것이지만 난 그런건 싫다. 이렇게 뜸 들이는 시간이 좋다. 뜸을 잘 들여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이든 아귀 수육이든 먹을 수 있다. 요리하고 나서 뜸을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인데 (나는 라면도 살짝 뜸을 들인다!), 요리하기 전에도 뜸 들일 때가 있다. 갈망을 ‘들인’다고 해야 할까. 요리와 나 사이에 차오른 갈망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요리를 한다. 그러면 맛은 뭐…….
갈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책을 펼치자 말리 고모가 로켓을 타고 뛰쳐나왔다. 워낙 에너지가 넘쳐서 “기차가 아니라 로켓을 타고 온 것” 같다는 말리 고모가 와야 비로소 크리스마스가 시작된다는 말에 뭔가가 제대로 시작될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내게도 크리스마스가 시작되었다. 세상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될 때 말리 고모가 오는 것이지만 소설에서는 말리 고모가 와야 비로소 빈의 크리스마스가 시작된다고 적는다. 그렇지. 이런 게 소설이지. 세상의 질서를 마음의 논리가 육박하고 압박해 뒤틀거나 뒤엎기도 하는 게 소설이지.
말리 고모는 누구인가. 마술사다. “검은색 마술 보따리를 풀어 엄청난 양의 향료와 양념”을 꺼내 주방과 집을 “번쩍이고 덜거덕거리며 냄새를” 풍기게 하는 마술사. 가족들이 나이를 먹는 동안 고모는 “단 하루도 더늙지 않고 그대로”다. 그리고 독재자다. “태풍 같은 엄청난 에너지”로 주방을 휘감아 원래 주방의 주인과 하녀는 맥을 못 추거나 마음이 상해 울게 만드는 독재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말리 고모의 독재는 장장 십팔 일간 지속된다. 오스트리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 6일에 시작되어 24일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12월 6일은 니콜라우스 축일로, 우리가 아는 산타클로스의 복장과 달리 주교의 의상을 입은 니콜라우스가 오는 날이다.
내내 말리 고모는 “구름 같은 밀가루 속에서” 일한다. 거의 계란과 버터 범벅이라고 할 수 있는 구겔후프를 굽고, 크리스마스 쿠키를 굽고, 후자렌도넛을 굽고, 파삭파삭한 갈색의 파시앙스 쿠키를 굽고, 스페인 바람이라는 이름의 푸딩을 굽고, 마르치판, 마르멜루 젤리, 럼트뤼프를 만든다. 계란과 버터가 듬뿍 들어갔다는 이유로 구겔후프를 먹고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내 생각에 현기증을 느낄 이유는 더 있다. 이렇게 쉴 새 없이 쿠키와 푸딩을 구워내니 밀가루와 버터와 설탕 냄새가 얼마나 집 안을 뒤덮었겠나! 밀가루 구름, 버터 구름, 설탕 구름이 십팔 일 내내 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끌어올리다가 마침내 잉어가 등장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크리스마스 잉어가 식탁에 오를 때 절정이었”다면서. 역시, 요리였다. 크리스마스 잉어 요리를 위한 첫 번째 관문은 12월 24일 아침 시장에서 ‘슈퍼 잉어’를 찾는 것이다. 독재자 말리 고모를 위시한 잉어 쇼핑단은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통통하고 힘 좋고 기름진 은빛 물고기”를 찾아냈었다. 어디 그뿐인가. 활기와 힘이 넘치는 놈들 가운데서도 아가미가 빨갛고 눈은 튀어나온 “제대로 된 놈”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변한다……. 이제 소설은 이런 활달한 잉어를 찾을 수 없게 된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좋았던 시절이 지나가고, 더 이상 그 시절로 갈 수 없게 되어버린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이야기 또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예감이 들었다. 황홀하게 끓어넘치다 어느새 비감이 찾아드는 이 소설을 읽은 이상 나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크리스마스 잉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수천 개의 밀랍 초가 피워내는 크리스마스의 달콤함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이 달콤한 갈망이 이내 쓸쓸함으로 바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