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흄세에서 ‘세’를 맡고 있는 편집자 세오입니다. 저는 근 몇 년간 MBTI의 시작이 E가 아닌 적 없는 확신의 외향형 인간이에요. 코시국 이전에는 일주일에 약속을 세 개 이상 잡아서 주변의 I들로부터 엄지 척을 받곤 했죠. 어떻게 그렇게 싸돌아다녔냐고요?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는 데서 에너지를 얻는 까닭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자꾸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어요.
주변 사람들은 좀 달랐어요. 남들이 어떻든 별 상관 안 하거나, 관심을 두더라도 몇 사람에게 한정됐죠. 왠지 그쪽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 게 결국은 제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요. 여러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와 깊이 관계 맺을수록 스스로가 선명해짐을 느낍니다.
소설을 읽는 일도 마찬가지인 듯해요. 때로는 경험에 빗대고 때로는 상상에 빚져 나라는 세계를 확인하고 넓혀가는 거지요. 시즌 1의 다섯 작품을 읽으며 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그중 하나를 나누고자 해요.
저는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 그중에서도 수록작 〈편지〉에 ‘과몰입’ 했는데요, 그간 만나온 남자들과 당시 제가 지녔던 불안한 마음이 떠올라 유쾌하진 않았답니다. 지금부터는 ⚠️TMI 대잔치가 될 텐데요, 홍보성 옅은 글을 써보려는 편집자의 ‘흑역사 창고 대방출’ 정도로 여겨주시길…….
대학에 입학하고 첫 소개팅을 했어요. 상대는 네 살 연상으로, 친구 남자친구의 친구였죠. 첫 만남 날, 처음으로 구두란 것을 신어보았습니다. 굽이 3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단화였는데도 어색하고 불편했어요. 카페에 앉아 세 시간 가까이 대화하고 나왔는데, 상대가 걷는 걸 좋아하냐고 묻더라고요. 날씨도 좋은데 좀 걷자면서요. 저는 내키지 않았지만 선뜻 그러자고 했습니다. 걸을수록 발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지하철역 두 정거장쯤 되는 거리를 걸었을까요? 상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너 뒤꿈치에서 피 나!”
고개를 돌려 발뒤꿈치를 살펴보니 웬걸, 상아색 에나멜 구두 뒤축이 붉게 물들었더군요. 그제야 불편함이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그보다 창피함이 우선이었습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되고, 안 하던 짓 한 걸 들켜버렸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전혀 몰랐다고, 별로 안 아픈데 피가 다 난다고 태연한 척했어요. 상대는 저를 잠시 벤치에 앉게 하고 사라졌다가 반창고를 사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 후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한참을 대화했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집이 전혀 다른 방향이면서 데려다준다기에 거절했고요.
두 번째 만남 전날, 약속 장소를 묻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상대에게서는 답이 없었습니다. 까였구나 생각했는데, 밤이 다 돼서야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연락을 못 했다며 답장이 왔어요. 일이 정리되면 다시 연락하겠다고요. 그때는 그 말을 믿었고, 걱정했습니다. 일이 잘 해결되고 연락이 오기만을 '얌전히' 기다렸죠. 며칠이 지나 다시 연락이 닿았고, 두 번째 만남에서 고백을 받았습니다. 실은 첫 만남 때 제가 데려다주겠다는 걸 단칼에 거절하기에 마음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좋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기에', 제게는 첫 남자 친구가 생겼어요. 따져 묻고 싶은 부분이 있어도 싸움의 씨앗이 될까 싶어 속으로 삼켰고, “너는 결혼 상대로 좋을 것 같아”라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마도 ‘괜찮아’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관계는 원치 않는 스킨십을 거절한 날 이후로 뚝 끝나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