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유산
유산이라면 유산이었다. 할머니 생전에 직접 내게 주신, 온 가족이 모인 어느 명절에 나만 따로 방으로 불러 은밀히 건네준 낡은 노트 세 권. 할머니는 의미심장하게 “이제 네 거다” 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내가 쓴 거다” 하고 덧붙였다. 가락지도 은비녀도 아니고, 하다못해 오래된 손거울이나 참빗 같은 것이라면 유서 깊다 여기며 장식이라도 해볼 텐데, 일기장인지 메모장인지 반쯤은 판독 불가한 글씨체로 휘갈겨놓은 노트가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사실 그때 나는 좀 기분이 상했다. 은비녀라도 쥐여주려나 기대했다가 실망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이제 네 거다”라는 말은 ‘비로소 자격이 되었다’는 뜻으로, “내가 쓴 거다”라는 말은 ‘글쓰기로 치자면 내가 먼저다’라는 뜻으로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었다고 알렸을 때 축하한다는 말 대신 그게 다 당신을 닮아서 그런 거라고 꽤나 으스댔으며,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까지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꾼인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쉴 새 없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전력이 있다. 게다가 그 무렵 출간된 첫 소설집을 드렸을 때는 고생했다거나 축하한다는 말 대신, 이게 다 내 덕인 줄 알라며 공치사만 늘어놓던 양반이었으니 아주 근거 없는 오해는 아니다.
그런데 그 노트와 관련한 마지막 언급은 좀 애매했다. “네가 좀 잘 살펴봐라.” 잘 읽어보라는 것도 아니고 살펴보라니, 무얼? 숙젯거리처럼 읽어보긴 했다. 동네 할머니들과 고스톱 친 얘기(돈을 딴 날보다 잃은 날이 더 많다), 자식들에게 서운했던 사연들(지들끼리만 해외여행을 갈 줄이야), 세배꾼들에게 받은 세뱃돈과 선물 목록(손자사위가 가져온 한과 세트에 별표), 빌려준 돈과 갚아야 할 돈 몇 푼(몇천 원에서 몇만 원까지), 다음번 할아버지 제사상에 추가해야 할 허파전과 낙지호롱이 조리법(본인이 먹고 싶은 것이 분명한) 같은 것들.
그중에서 특히 내 눈에 띈 건, 먼저 간 남편을 향한 애달픈 연서 혹은 연가였다. 그저 그리운 마음만이 아니었다. 보듬고 얼싸안고 입 맞추고 저세상에서 만나 어화둥둥 신나게 놀아보자는 바람까지. 좀 웃겼다. 일흔 살 넘은 여자가 뒷방에 앉아 꿈꾸는 사랑이라니. 워낙 흥이 많은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손주 새끼들 물장구치고 놀면 그 사이에서 보다 신나게 어푸어푸 물보라를 일으키고, 노래며 춤이며 시도 때도 없이 가락을 타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할아버지와 다시 만나면 할 일들에 대한 표현의 수위가 이리 노골적일 줄이야.
진짜 황당했던 건 그 노트를 내게 준 목적을 알게 된 때였다. 수개월 후 다시 만났을 때 할머니가 물었다. “그래, 잘 읽어봤냐?” “네, 재밌게 봤어요.” “그래, 뭐가 좀 될 거 같으냐?” “뭐가요?” “네가 한번 잘 만들어봐라.” 책이 될 만하냐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라 당신의 책. 비로소 조각이 맞춰졌다. 그러니까 내가 소설가가 된 건 모두 당신의 피를 물려받은 덕이고, 쓰기로 치자면야 노트 세 권 분량이나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니, 이제 당신의 책을 낼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말씀. 너만 작가냐 나도 작가다. 유산이 아니라 청탁. 아, 이 주책맞은 노인네야.
《불쌍한 캐럴라인》을 읽으면서 내내 그 노트 생각이 났다. 돌려주지 않았으니 내 손에 있을 텐데, 온 집 안을 다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별 쓸데없는 노트로 굴러다니다 버려졌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뭐라도 되게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할머니를 가져다 쓴 소설이 꽤 여러 편이다. 한껏 비웃으며 많이도 갖다 썼다.
아, 불쌍한 캐럴라인. 그건 저마다의 연유와 욕망으로 캐럴라인에게 발만 살짝 담근 사람들이 하는 얘기. 일흔 살 넘은 여자 인생에 뭐 그리 대단한 게 있을까 비웃으며, 챙길 건 챙긴 사람들이 하는 얘기. 그러나 캐럴라인의 불쌍한 조각들이 마침내 하나의 아름다운 둥지로 탄생하게 되니. 숲의 건축가 바우어 새의 둥지처럼. 쓸모없는 나뭇가지, 깃털, 유리 조각 들이 만들어낸 기하학적인 아름다움. 그 위에서 펼쳐질 구애의 춤은 또 얼마나 활기찰지. 《불쌍한 캐럴라인》을 덮으며 남는 여운은 설렘이다. 요 이쁜 것들, 잘 살아야 해. 응원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진짜 유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