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칼럼에서 트렌치코트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원래 영국 장교들의 옷이었던 이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중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 옷 자체가 이미 ‘영국군 장교’를 의미했고, 너 나 할 것 없이 이 ‘엘리트 집단’의 일원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유행의 이유는 간단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다. 가령 실제 영국군 장교가 있다고 치자. 그가 트렌치코트가 아닌 포로의 옷을 입고 있다면? 그는 이것을 해명할 때까지 집단 린치를 당할지도 모른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직 이런 ‘역사 속’ 사건에서뿐 아니다. 여성 아이돌의 몸매와 피부를 보며 백인 백치 미인의 상징인 ‘바비 인형’ 같다는 비유를 한다거나, 피부 톤이 어두운 여성들에게 화장을 권유한다거나, 키가 작고 마른 남성들에게 운동을 거론 하며 ‘남자답기/여자답기’를 말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거의 돌림노래 수준으로 재현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언가 ‘보여지는 것’으로부터 구분 짓기가 일어 나는 경우, 우리는 무언가의 기준에 의해 선택되고 또 배제된다. 그리고 그 선택과 배제가 익숙한 사회에서는 ‘예외’를 예측하지도 못한다. 아니, 인정하지 못한다. 하 지만 그런 예외는, 아니 어떤 배제가 보편에서 제외한 무엇인가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물론 그건 질병도, 사탄도 아니다. 일상 어디에나 있다. 바로 이 책의 주인공 리 앤더슨처럼 말이다.
새하얀 흑인.
이건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다. 여기에 정말 리 앤더슨이 있다. 그러니까, 한 명의 흑인이 있다. 단지 하얗기 때문에 백인으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던 한 명의 흑인. 그리고 그 반대편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흑인 한 명이 있다. 그의 동생, 백인 여성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집단적인 폭력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의 동생은 독실하고 신실한 교인이었으며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미국의 정당한 구성원이었다. 다만, 그는 한 여성을 사랑했으며 그 여성은 그와 다른 백인이었다. 그게 무엇이 어떻단 말인가. 그렇지,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대부분은 (아마도) 흑인이 아닐 것이고, 그런 우리 대다수는 흑인이 백인 여성을 사랑하면 죽을 수도 있는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다. 그러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것에 정당하고 논리적인 문제점을 제 기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 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런데 과연 그것이 우리와는 다른 시기,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시대에도 가능한 질문이었을까. 그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려던 한 명의 흑인은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가. 그렇다, 죽음이었다. 그것도 끔찍한 폭력 속에서,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데 새하얀 피부를 가진 ‘나’ 리 앤더슨은 ‘나’의 동생과는 다르다.
흑인 특유의 넓은 어깨, 길쭉한 팔다리, 다부진 몸. 거기에 새하얀 얼굴과 멋진 금발. 그뿐인가. 재즈에 대한 리듬감까지 갖춘 예술적 아우라가 넘치는 사람. 아마도 ‘백인’ 남성들이 원하던 모든 조건을 가진 사람. 모든 사람이 한 번만 그에게 손을 내밀어달라고 안달한다.
사실 리는 혼혈 혈통으로 하얀 피부를 갖게 된 흑인이다. 피부색 덕분에 살아남게 된 주인공 ‘나’는 매주 새로운 여자들과 어울리고 교회 따위는 책을 팔기 위해서나 드나든다. 믿음 대신 욕구만 들끓는 인간이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여자들을 만났다? 글쎄, 소설을 읽다보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번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소설 속 리 앤더슨이 동생의 복수를 하려는 것은 맞지만, ‘리 앤더슨’이라는 인간은 원래부터 여자의 몸을 욕망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몸과 피부색을 이용하는 걸 애당초부터 저어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면 과연, 리 앤더슨이 동생의 복수를 위해 죽여야 할 백인 여성을 찾는 동안 수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고 끝내 애스퀴스 자매를 죽인 것을 무엇이라고 봐야 할까. 실제 그가 죽인 자매는 동생의 죽음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지 ‘백인’, ‘여성’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게다가 흰 피부를 가진 많은 흑인이 내부에서 겪는 또 다른 고통들을 생각해본다면 리 앤더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더욱 복잡해진다. 과연 우리는 주인공 ‘나’의 이런 살인을 ‘복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는, 그런데 과연 내가 이 모든 것을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놓였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러니까 흑인이 아니고 ‘단일’ 민족을 주장하는 나라에서 혼혈이 아닌 내가, 백인 남성을 사랑한다고 해도 지탄받을 일이 거의 없을 내가 감히 소설 속 ‘나’를 향해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 반대편에서, 마치 리 앤더슨의 동생이 겪은 폭력과 유사하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타깃이 되는 이곳에서 리 앤더슨의 복수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죄 없는 타인에 대한 폭력은 그 어떤 정당성도 없음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이 질문으로 옭아매는 듯했다. 만약 너무나 명백하게 정의로운 화자가 피해자에서 단죄하려는 자로 이행하는 서사였다면 아마 나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확히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은 소설로서 확실히 빛을 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얀 얼굴 뒤에 숨은 주인공 리 앤더슨처럼, 단지 하얀 피부만을 보고 그를 철저하게 신뢰하는 백인들을 비웃는 그처럼, 보리스 비앙은 필명 뒤에 숨어서 독자들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는 듯했으니까. 피부의 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어떤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단 한 번이라도 가면을 벗고 이름 뒤에 숨겨진 진실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보라고. 이 소설의 끝에도,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도 아직 무엇이 놓여 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선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 더 필요한 것 같으니까. 다만 나는 ‘누군가’의 무덤에 함부로 침을 뱉지는 못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도 온전히 윤리 적이거나 도덕적이지 못한 나 자신의 무덤에 침을 뱉는다면 모를까.
이 소설이 남긴 것은 서로의 무덤이다. 누가 누구에게 침을 뱉을 수 있을지, 그건 아직 모를 일이다. 이 소설은 그 질문을 남겼다. 아주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