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장난감》은 1926년 작품이다. 지금은 2022년. 작가인 로베르토 아를트와 나 사이에는 대략 100년이란 시간이 있다. 100년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미친 장난감》에 나타나는 100년 전과 현재의 인간 세상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지점이 많다.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지 않다는 것. 청소년 시기에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저임금 노동뿐이라는 것. 부와 가난은 세습된다는 것. 돈과 권위를 가진 자들이 그런 것을 갖지 못한 자들을 차별하고 착취한다는 것. 가난한 자들은 서로를 경멸하고 부자를 동경한다는 것.
속임수를 통해 얻은 돈은 우리 앞에서 더 가치 있고, 더 신비스러운 척했고,
최대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며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
그건 사람들이 혐오하는 비열하고 불쾌한 돈이 결코 아니었다.
뼈 빠지게 일해서 버는 돈이 아니라 눈치 빠르고 영리한 돈,(38쪽)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현대의 가상 화폐와 주식 투자, 부동산 투기와 각종 사이버 범죄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트코인으로, 주식으로, 아파트 시세 차익으로 누구는 얼마를 벌었다더라 하는 소문을 전하는 사람의 번뜩이는 눈빛. 나는 요즘 사람들이 노동(일을 해서 버는 돈)을 혐오한다고 느낀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 취급 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노동의 하찮음을 감지한다.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버는 돈(불로소득)을 찬양한다. 법을 위반하더라도 돈만 잘 벌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 ‘한밤의 신사들 클럽’이 내린 “강도질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행위라는 확신”을 우리는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가난한 자의 강도질은 비난과 경멸을 받는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강한 처벌을 내리라고 요구한다. 반면 부자의 강도질에는 한없이 관대하다. 대기업 총수 또는 정치인의 탈세, 비자금 은닉, 횡령과 배임은 무죄 또는 감형과 사면의 대상이다. 노동자를 차별하고 착취하여 돈을 벌고 불법으로 재벌의 삶을 세습하는 것과 강도질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돈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100년이 지나도록 변함없다.
소년 실비오는 가난과 고통에 잠식되어 있다. 그는 발명가 또는 시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의 고용주들은 그를 무시하고 의심하고 착취한다. “돈 이야기와 표독스러운 말밖에 토해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역겹고 혐오스러운 감정에 사로잡힌 내 삶이 슬슬 짜증 나”는 실비오. 그는 돈이 필요해서 돈을 좇지만 돈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에게 “정말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다. 고통과 경멸로 뒤덮인 삶에서도 실비오는 “사랑, 동정심, 삶과 책, 그리고 세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 마음은 “산과 숲, 그리고 하늘과 기억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신”과 같다.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찾는 정체불명의 신이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신. 마침내 그를 구원하는 존재는 ‘구역질 나는 하느님’이 아닌 그가 끝까지 지켜낸 그 마음, ‘인생은 아름답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선뜻 그 마음을 전할 수 없다.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테니까. 매일 고통과 경멸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이 아름답다는 것만 깨달아도 얼마나 행복한 줄 몰라요”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나 또한 고통스럽다’, ‘나 또한 이 삶을 증오한다’는 말을 원한다. 우리 모두 지옥에 있으며 이 지옥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으니 서로를 착취하고 속이는 짓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합리화할 수 있도록.
튼튼한 집에서 금고에 돈을 가득 넣어두고 끼니마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사는 사람이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수긍하겠지만 공감하진 못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오직 그의 것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고통과 경멸, 범죄의 유혹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지 않을까? 반짝이는 그 마음을 어떻게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는지,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까?
고전을 읽을 때마다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 생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인간의 지독함, 부조리함, 잔인함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어떤 정신 또는 마음을 되새기다보면 나는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쑥스럽지만 아주 중요하고 진지한 질문에 답을 구하고 싶어진다. 나는 인간의 고상한 가치를 사랑한다. 그런 가치를 끝까지 놓지 않는 소설 속 인물에게서 힘을 얻는다. ‘세상은 지옥이다’라는 문장보다 ‘인생은 선물이다’라는 문장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나는 최대한 진지하게 살고 싶다. 그런 태도가 타인의 비웃음을 사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나는 이 삶을 경멸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고 싶다. 실비오처럼 하늘과 기억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나의 신을 지켜내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