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스펀딩]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40 《미스 몰》

2024.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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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S 📌

① ｜예스펀딩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마지막 시즌｜시즌 8. '나의 기쁨, 나의 방탕'｜COVER STORY

② ｜본문 미리보기｜본문 미리보기 2

③ ｜어느 ‘공상 아티스트’의 근무 일지_김멜라(소설가)

예스펀딩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마지막 시즌

‘나의 기쁨, 나의 방탕’

위대하든 보잘것없든
속절없이 나를 이루는 것들에 대하여

📌 안녕 에디션
📌 예스24 한정 어나더 커버 추가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의 시즌제를 종료하는 안녕 에디션
📍 본표지와 함께 예스24 한정 어나더 커버를 슬립 케이스(각 권)로 추가 제작
📍 소설가 김멜라, 임선우, 김기태, 성해나, 성혜령 추천

시즌 8. '나의 기쁨, 나의 방탕'

036 주홍 글자
너새니얼 호손 | 박아람 옮김

037 뾰족한 전나무의 땅
세라 온 주잇 | 임슬애 옮김

038 상하이 폭스트롯
무스잉 | 강영희 옮김

039 사생아
이디스 올리비어 | 김지현 옮김

040 미스 몰
E. H. 영 | 정연희 옮김

COVER STORY

흄세 레터가 시즌 8. '나의 기쁨, 나의 방탕'으로 돌아왔습니다. 《주홍 글자》를 제외한 《뾰족한 전나무의 땅》, 《상하이 폭스트롯》, 《사생아》, 《미스 몰》은 국내에 처음 번역해 소개하고, 《사생아》와 《미스 몰》은 작가도 국내에 처음 선보입니다.

오늘은 작가도 작품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미스 몰》을 소개합니다. 세계문학을 읽으면서 매번 등장하는 '가정부'가 궁금하신 분은 없으신가요? 그들의 입을 통해 이 이야기 전체를 다시 듣고 싶다고, 저는 종종 생각해왔는데요. 이 책은 1930년대의 젊은 고전으로 가정부 '미스 몰'이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김멜라 소설가의 리뷰도 수록해두었으니 많이 기대해주세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39 《사생아》

예스24 어나더 커버 슬립 케이스

"우리는 가장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간 문학사에서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은 ‘가정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1930년대의 유쾌한 고전입니다.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한 E. H. 영의 대표작이며, 작가도 작품도 국내 처음으로 소개합니다.

20년 동안 가정교사나 노부인들의 동반자로 살아오며 불안정하게 생계를 유지해온 가정부 ‘미스 몰’이 ‘로버트 코더’ 목사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코더 집안사람들의 변덕과 기질에 휘둘리면서도 자기 주도성을 잃지 않는 미스 몰이 유리 조각처럼 흩뿌려놓은 사랑, 위트, 속삭임, 상상력을 그러모아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어가는 독자는 어느덧 자기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 미스 몰에게 푹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몇 년 동안이나 끈덕지게 마음을 괴롭혀서 끝내 종이에 꾹꾹 눌러쓸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위대하든 보잘것없든 속절없이 문학이 됩니다.” 《뾰족한 전나무의 땅》을 ‘미국 문학의 3대 걸작’으로 꼽은 윌라 캐더는 세라 온 주잇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속에 끈적하게 들러붙은 불편한 장면들까지 떼어내지 않고 받아들여야 수백 년을 살아남는 ‘문학’이 되듯이, 위대하든 보잘것없든 ‘나’를 이루는 것들을 담대하게 마주해야 비로소 내가 ‘나’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섯 편의 소설을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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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미리보기

미스 몰은 천천히 수레 뒤에서 걸어갔다. 낡은 트렁크가 자신의 관 같았고, 유일한 애도자는 자신의 유령 같았다. 작은 바람이 보도에 떨어진 나뭇잎을 휩쓸었고, 정원에서는 관목들이 바스락거렸으며, 지친 조랑말의 발걸음 소리와 바퀴 굴러가는 소리에 그녀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리고 돈이 좀 들더라도 택시를 타서 좀 더 열성적인 모습으로 도착했다면 더 좋았을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 행렬은 아주 우울했고, 트렁크를 끌고 이 집 저 집 전전하는 자신과 같은 여성 부대의 파견대처럼 느껴졌다. 그 슬픈 여성 군단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고 신경을 쓰고 질병을 감추고 나이를 낮춰 말하고 번 만큼의 가치보다 더 적은 돈을 줘도 감사히 받는다. 그들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녀는 자꾸 슬금슬금 나이를 먹어갔고, 모아둔 돈은 전혀 없었다. 곧 이런저런 자리에서 일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잠시 두려움의 차가운 손이 그녀를 붙잡았고, 그녀도 그들처럼 도랑으로 쓸려 들어갈 거라고, 누구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지 않을 거라고 소곤소곤 경고하는 낙엽의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녀의 두려움은 적어도 자신이 사라진 것을 재앙으로 여겨줄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할 거라는 갈망으로 바뀌었다. “누구도 그러지 않을걸!” 낙엽들이 악의적으로 속삭였고, 그러는 사이 관목 숲에서 작은 돌풍처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해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업신여기듯 쳐다보았다. 그녀는 웃음거리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고, 겁을 먹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더욱 걸음을 빨리해 수레와 나란히 걸었다.

(76~77쪽)

랑's pick

그들은 다 어떻게 되었나요. '미스 몰'은 어떻게 될까요. 소설 초반에 이 부분을 읽은 뒤 미스 몰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 미리보기 2

이 가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자문했다. 그리고 자신은 왜 여기 계속 있어야 하는가? 그녀는 다른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늙지도, 그렇게 쓸모없지도 않았지만, 침대보 밑을 바짝 파고들며 “미스 몰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고 아이처럼 말하던 루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코더 부인과의 협정을 떠올렸다.

“이것부터 해야겠어.” 그녀가 말하면서 코더 씨에게 가져갈 쟁반을 재빨리 준비했고, 가족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로 한 사람처럼 이 의식적인 행위에서 은밀히 허식적인 동작을 취하며 그의 서재로 쟁반을 가져갔다. (178쪽)

(......)

해나는 집이 없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처럼 크리스마스를 싫어했다. 그녀가 이 일을 해오면서 연락이 완전히 끊기지 않은 사람은 몇 명뿐이었고, 이들에게는 편지를 써 보냈지만, 아는 사람 자체가 얼마 없고 그들과도 정말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연중 이맘때가 되면, 그녀는 그 사실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져 스스로 자신이 얼마간 실패한 사람이라고 설득할 정도였다. 로버트 코더가 최근에 그 사실을 강조했듯 자신이 의탁해서 사는 집의 외부에서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쉽지 않았고, 종종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의 일이 그녀의 일인 양 몰입해 헛된 열정으로 보살핀 사람들 대부분에게 그녀는 그저 미스 몰로 남았을 뿐 그녀의 중요성은 그녀라는 존재의 유용함과 같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했지만, 여전히 그것이 놀라웠다. 그녀에게 인간이란 끊임없이 놀라움을 낳는 존재였고, 이들 인간 군상은 그녀가 절반은 창조자고 절반은 구경꾼인 드라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결코 시들해지지도 않고 결코 끝나지도 않는 이런 즐길 거리 없이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해나는 기차를 놓치고 기차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것이나, 객차에서 눈을 감거나 신문을 읽는 것을 시간 낭비로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그녀는 낯선 사람들이나 그들의 개성이 발산되는 것을 보면 흥분했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흥분을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270~271쪽)

랑's pick

다른 사람에게 지옥을 만들어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해나. 하지만 해나의 외로움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부분에서는 저는 숨을 잠깐 멈추곤 했어요.

어느 ‘공상 아티스트’의 근무 일지

_김멜라(소설가)

부끄럽지만 나는 코가 긴 여자는 상당히 박력 있는 사상을 품고 있을 거라는 관상학적 편견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번에 《미스 몰》을 읽으며 ‘코 생김새와 내면 기질’에 관한 개인적 예시가 하나 더 늘었다.

소설 속 ‘해나 몰’은 모나리자를 닮았다며 자신을 칭송하는 남자에게 “긴 코가 닮았겠죠”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해나는 자기만의 농담론으로 웃음에 인색한 주변인들의 안면 근육을 사정없이 반죽하고, 웃음 띤 얼굴로 타인과 자기 사이에 “생각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경계선을 긋는다. 참고로 내가 느끼는 서평 쓰기의 좋은 점은 이면지에 소설을 프린트해 그 종이 여백에 마음껏 메모를 끄적일 수 있다는 것인데, 나는 《미스 몰》의 페이지마다 ‘아, 웃긴 여자’, ‘아아, 웃기고 똑똑한 여자’, ‘이럴 수가, 웃기고 똑똑한데 친절하기까지 한 여자!’라고 적었다.

해나는 타인을 향한 부러움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는다(감정은 그것을 느낀다 해도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자기 신분과 외모에 관한 평가는 받아들이지만, 세계와 인간 본질에 관한 자기만의 성찰을 타인이 간섭하는 건 절대 봐주지 않는다. 언제나 머릿속에 공상과 거짓말이 반짝거리며 솔직함과 은밀함이 왼손과 오른손처럼 짝을 이루고 다른 이를 향한 연민과 술수가 동맥과 정맥처럼 내면에서 교차해 구체적인 행동과 계획되지 않은 사건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해나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지 아는 사람이며 그렇기에 그것을 약점 삼아 권력을 휘두르려는 타인에게 농락당하지 않는 줏대 있는 자기 법칙의 사령관이다. 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이런 기품과 실천력을 동시에 획득한 걸까?

우연찮게도 해나는 나와 동년배이고(한 명은 20세기 초에 살며 코르셋에 둘러싸여 있지만), 내가 동경하는 재산의 소유자인 데다가(농사지을 수 있는 땅과 오두막) 한 업종에 오래 종사한 프로 직업인이다. 해나는 20년간 가정부 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렇다고 곁방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고용주의 비위를 맞추는 비천한 하인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해나는 자기의 고용인들만큼이나 박식하고, 시시각각 제 발목을 끌어내리는 위험 속에서도 기백과 기사도를 발휘하는데, 주눅 들지 않는 해나의 목소리와 총명한 눈빛은 같이 사는 고용주를 불편하게 만든다. 해나는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고(“오, 돈이 뭐라고!”) 제아무리 고용인이 요구한다 해도 강아지를 발로 차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해나에게 그들은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맺어진 계약관계이며, 그 계약마저 상대의 변덕이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꾀를 부려 억지로 부여된 책임감에서 줄행랑친다. 《미스 몰》은 크게 보면 이 천연스러운 피고용인의 대담하고 세련된 근무 일지이며 나는 해나의 자진 퇴사와 입사 청탁이라는 노련한 밥벌이 스텝에 따라 유쾌하고도 고약한 가정 관리인 생활을 함께했다.

해나의 본격 입주 가사도우미 서사가 펼쳐지는 곳은 성직자 ‘코더 씨’의 목사관이다. 남자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 여성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성마른 코더는 일상다반사가 흥미로운 공상의 재료라 여기는 해나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칭찬받기보다 기꺼이 실망을 안겨주려는 오만하고 자족적인 이 여성을 어떤 종교의 계명으로 길들일 수 있을까? 해나는 ‘숨겨진 과거’가 폭로된 순간에도 도무지 사과나 변명을 모르니 그녀를 추궁하던 사람도 그 월등한 패기에 결국 매료되고 만다. 얼핏 원수처럼 싸우던 남녀가 미운 정이 쌓 여 돌연 연인이 되어버리는 전형적인 가정교사 로맨스를 떠올리기 쉬우나 작가 E. H. 영은 독자를 현혹하는 멜로드라마의 핑크빛 구름 사이를 교묘히 비행할 뿐 소설의 주요 추진력은 밀도 있는 추리극과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심리 게임이다. 해나는 마치 티브이 가족 시트콤처럼 오디오가 비지 않는 개성 있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찬미와 질투와 오해를 폭포수처럼 맞으면서도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그들의 본능과 억압을 분석하고 헤아린다. 다시 말해 물과 기름을 한데 섞는 유화제 같은 해나의 가사 노동능력은 그녀의 통찰력과 배려심에서 나온 애정 어린 관심이며 그들은 해나의 지휘 아래 마음의 먼지를 떨고 구멍을 메우고 따스한 수프를 먹는다.

해나의 손길은 흡사 우유에 적신 빵 조각 같고, 배 위에 올려둔 뜨끈한 물주머니 같아서 어머니를 여읜 막내 ‘루스’는 해나에게 애정과 충성을 맹세한다. 놀라운 점은 커튼 빨기나 식사 준비 같은 자질구레한 일이 해나에겐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속박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해나는 언제나 가정 안에 속해 있지만 어느한 가정에 종속되진 않는데, 구태의연한 관습의 울타리는 해나에게 언제고 넘나들 수 있는 다소 가소로운 새장이다. 영리한 실용주의자이자 파괴와 창조의 에너지가 내면에서 시소를 타는 ‘공상 아티스트’에게 가정생활이란 잠시 들러 모이와 물을 얻는 유용한 일자리인 것이다. 기업이 없는 나라는 있어도 가정이 없는 나라는 없지 않은가. 어디로 가든 해나는 혈연 공동체의 용병으로 자신의 텐트를 치고 유목할 수 있으며 타인의시선과 평판이라는 담벼락에 개구멍을 낼 수 있다. 옮겨 다닌 집만큼이나 그 집안의 가정사를 내밀하게 탐색한 해나는 흡사 전지적 샹들리에 시점으로 이렇게 말한다. “최고의 아내는 결혼하지 않은 아내다.”

스스로 쌓아 올린 경험과 성찰로 격조 있는 명제를 만들고, 그 문장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유유히 산책할 수 있는 자유. 해나에겐 그것이야말로 일로 쌓인 피로를 푸는 해독제이자 삶의 신성한 기쁨이다. 해나는 도시를 걸으며 사람과 사물을 비평하고, 구릉지대를 오가며 나무의 자람새와 울새 소리를 따라 몽상의 파도를 탄다. 해나의 진면목은 바로 이 산책하는 리듬과 맞물려 뒤섞이는 칵테일 같은 공상에서 드러나는데, 나는 이 상상하는 특권이야말로 해나의 고유한 기질이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녀의 은신처라 느꼈다. 오직 상상만이(해나는 ‘허구’라 표현한다) 우리가 공들여 가꾸어갈 만한 자기의 소유지인 것이다. 해나에게 사색과 공상은 취미나 가욋돈으로 과시하는 자아도취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자양분이며 그 땅에서 키운 비현실
의 드라마야말로 타인과 나누는 결실이 된다.

언제나 키득거리는 장난기를 잃지 않고 누구든 완전하게 냉소하지 않으며 오히려 욕망에 휩쓸리는 타인을 가엽게 여기는 도량. 해나에게 산책하며 떠올리는 온갖 생각은 번다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게 해주는 반항아의 지침서인 동시에 그렇게 배회하고 떠돌며 해나는 자기에게 불리한 타인의 선택마저 지지하는 관용의 거리를 얻는다. 그런 해나가 과연 한 가정이라는 새장에 만족하며 방랑을 멈출 수 있을까?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해나가 유일하게 자기의 소신보다 그 결심이 미치게 될 영향을 염려하게 만든 존재는 어린 루스다. 과거의 비밀을 파묻은 해나와 엄마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에 파묻힌 루스가 맨손으로 그 흙더미를 파헤치며 서로를 위해 ‘야간 등’ 하나를 밝혀주는 이야기에서 나는 자신을 굽히는 사랑의 낮은 얼굴과 마주했다. 그렇기에 나는 꼬마 이상주의자 루스가 주장하는 ‘예배당에서 지켜야 할 침묵의 규칙’이 전세계 모든 사원의 제1 계명으로 선포되길 바란다. 어떤 소설이건 가장 작은 아이가 그 세계에서 가장 지혜롭고 또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데 단호하니 말이다.

더불어 해나가 루스에게 들려주는 ‘도둑과 가발 이야기’는 어딘가에 있을 법한 해나의 미발간 자서전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하면서 유머와 품위가 담긴 에피소드 모음집’에 실릴 듯한 이야기였다. 이제 나는 어둑한 숲길을 걸으며 그 길이 “자신의 장례식이고 자신이 유일한 애도자”라고 느끼는 미스 몰을 따라 온전한 고독과 몽상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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